
약속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상하게 말이 없어지는 날이 있다. 분명 웃고 떠들고 밥도 맛있게 먹었는데, 현관문을 닫는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진다. 무슨 큰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뿐이다.
처음에는 내 체력이 약해졌나 싶었다. 그런데 같은 시간을 보내도 어떤 사람과 있으면 오히려 힘이 나고, 어떤 사람과 있으면 방전된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차이를 곰곰이 따져 보니 피곤함의 정체는 만난 시간이 아니라 만난 사람에게 있었다.
기가 빨리는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겪은 경우를 정리해 보면 비슷한 패턴이 있었다.
첫째, 대화가 한쪽으로만 흐른다. 한참을 듣기만 하다가 내 이야기를 꺼내려 하면 어느새 상대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둘째, 하소연이 끝나지 않는다. 같은 고민을 몇 달째 반복하지만 해결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조언해도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로 끝난다.
셋째, 은근히 비교하고 평가한다. 직접적인 비난은 아닌데 대화가 끝나면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이런 사람들이 반드시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소에는 다정하고 나를 아껴 주는 사람일 때도 많다. 그래서 더 어렵다. 미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만나기는 힘든 관계가 된다.
내가 참을수록 관계는 나빠진다

예전의 나는 그런 관계를 오래 붙들고 있었다. 상대가 힘들어 보이면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거절하면 매정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이 지친 채로 관계를 이어가면 결국 표정과 말투에 드러난다. 짜증이 늘고, 약속이 다가오면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러면 오히려 상대에게도 좋지 않다. 억지로 이어간 관계는 서로에게 빚처럼 쌓인다. 나는 참았다고 생각하고, 상대는 영문도 모른 채 서운해한다. 그렇게 끝나는 관계는 처음부터 조금씩 거리를 조절했을 때보다 훨씬 아프게 끝난다.
거리를 둔다는 건 끊어내는 게 아니다

거리 두기를 관계를 끊는 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거리를 둔다는 것은 만남의 빈도와 깊이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으로 조정하는 일이다. 몇 가지 현실적인 방법이 있다.
만나는 횟수를 줄인다. 매주 보던 사이라면 한 달에 한 번으로, 한 달에 한 번이던 사이라면 분기에 한 번으로 늘려 본다. 이유를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요즘 일이 바빠서라는 말이면 충분하다.
만나는 시간을 짧게 잡는다. 저녁 식사 대신 점심이나 차 한 잔으로 바꾸면 끝나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정해진다. 끝이 보이는 만남은 훨씬 덜 지친다.
대화의 주제를 바꿔 본다. 상대의 하소연이 이어질 때 "그럼 이번 주에는 어떻게 해 볼 거야?" 하고 방향을 바꿔 본다. 그래도 같은 자리를 맴돈다면 그 관계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몫은 거기까지라는 신호일 수 있다.
거절을 연습한다. 처음에는 어렵지만 "이번엔 어렵겠다, 다음에 보자"라는 말은 생각보다 큰 문제를 만들지 않는다. 거절해도 관계가 끝나지 않는다는 걸 몇 번 경험하고 나면 훨씬 편해진다.
죄책감은 자연스럽다

거리를 두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너무 차갑게 대한 건 아닐까, 그 사람이 힘든 시기인데 외면한 건 아닐까 싶다. 이 죄책감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죄책감이 든다고 해서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의 감정을 받아 주는 일은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내가 무너지면 정작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곁에 있어 줄 수 없다. 나를 지키는 일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 곁에 있기 위한 준비에 가깝다.
반대로, 나는 누군가의 기를 빼는 사람은 아닐까

글을 쓰다 보니 한 가지 질문이 남았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만나고 나면 지치는 사람이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요즘 힘들다는 말을 자주 꺼내면서 상대의 안부는 제대로 묻지 않았던 날들이 떠올랐다.
관계는 늘 양쪽이 만든다. 내가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어딘가에는 나와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대화 끝에 한 번씩 스스로 묻는다. 오늘 나는 들은 만큼 말했는지, 받은 만큼 돌려줬는지.
맺으며

사람을 만나고 나서 느끼는 피로감은 무시해도 되는 감정이 아니다. 내 마음이 보내는 가장 정직한 신호다.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관계의 거리를 조금씩 조정하는 일은 어른이 되어서 배우는 중요한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과 가까울 필요는 없다. 가까이 있어도 편안한 사람, 멀리 있어도 마음이 닿는 사람, 그 정도면 충분하다. 오늘 연락처를 보다가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름이 있다면, 그 관계에서 내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한 번쯤 들여다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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